막걸리 예찬 -휘준-
탁주라 말 마시라 요거트가 따로 없네
열흘에 스무 병씩 고이 담겨 도착하니
찬장에 쌓인 술 보면 부럽잖다 임금님도

고1 때 배웠지. 고시조는 종장 첫음절만 맞춰주면 누구도 시비 걸지 않는다구.
막걸리에 폭 빠져 한시(漢詩)도 한 수 지어봤네
막걸리 예찬(濁酒禮讚)
莫謂濁酒劣 (막위탁주열) — 탁주라 깎아내려 말하지 마시라
酸乳豈異哉 (산유기이재) — 요구르트와 맛과 멋이 무엇이 다르리
十日二十瓶 (십일이십병) — 열흘마다 스무 병씩 정성스레 찾아오니
棧上積玉液 (잔상적옥액) — 찬장 위에 고인 옥액 가득 쌓인 모습에
帝王何足羨 (제왕하족선) — 제왕의 부귀인들 어찌 부러우리오
막걸리 변주곡, 요즘은 주전자에 따라 마신다
냉장고 위 찬장에 가지런히 들어찬 흰 병 스무 개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굳이 세상을 다 가지지 않아도 마음이 배부르다.
열흘마다 때를 맞춰 집으로 배달되어 오는 이 정갈한 뽀얀 술빛은, 이제 내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벗이 되었다.
마눌님이 "노인이 슈퍼에서 술병 들고 나오는 것 보면 해망쩍다." 해서, 20병씩 박스 술 배달 작전으로 한 방에 해결.
돌아보면 막걸리의 모양도 세월 따라 많이 변했다.
사십여 년 전 청춘의 한복판에서 만나던 막걸리는 큼직한 독구리 항아리에 담겨 있었다. 동네 가게의 묵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양은 주전자로 들이붓던 그 술은 솔직히 말해 그리 깔끔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래도 그 시절엔 술기운인지 호기였는지, 말술을 거침없이 삼켜내며 밤이 깊어가는 줄을 몰랐다.
이십여 년 전쯤 되었을까. 가벼운 플라스틱 통에 개별 포장되어 나오기 시작했을 때 비로소 탁주는 미운 오리 새끼를 벗어던지고 깔끔한 옷을 입었다. 다만 포장이 허술해 조금만 기울어져도 뚜껑 사이로 술 거품이 흘러내렸으니, 먼 길 나서는 배낭 속에 모셔 가기엔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요즈음의 막걸리는 그야말로 만고의 진화다.
깔끔함은 말할 것도 없고 포장이 완벽하여 지방 산천으로 먼 여행을 떠날 때, 배낭 깊숙이 집어넣어도 한 방울 샐 염려가 없다. 매끈한 병에 담긴 그 모습은 고소하고 상큼한 요구르트 술이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번듯하다.
매끈한 병도 지방마다 그 모양이 다르다. 술의 옷은 깨끗해졌으나, 그 술을 받아 드는 내 몸의 품은 세월의 무게만큼 작아졌다. 그리고 시골에 가면 꼭 그 지방의 막걸리를 사 먹는 습관으로 바뀌었으나, 날이 갈수록 그 양이 줄어든다.
40년 전 말술을 비우던 당당함은 20년 전 세 병에 비틀거리던 청장년의 길목으로 접어들었고, 칠순을 넘어선 지금에 이르러서는 딱 두 병이 내게 가장 알맞은 주량이 되었다.
잠들기 전 유튜브 가야금 소리에, 주안상에 앉아 깨끗이 두 병씩 비운지도 10년 개근을 채워간다. 거기다 맥주 한 잔 더하면 바로 기절이니 그 술만은 참는다. 그러나 가끔 세상 탓할 일 생기면 그때는 플러스 캔맥주 한 잔.
옛날 임금님들은 많이 살아야 4~50살 사셨다는데, 그 두 배 가까이 살아가는 내 나이에 무엇을 욕심내랴.
세상은 알맞게 아늑해지고 마음은 더없이 너그러워진다.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딱 그 한 잔만큼 취해 바라보는 세상, 70대 노인의 기쁨이 바로 이 한 잔의 다정함 속에 다 들어있다.
막걸리 노래는 여인이 불러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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