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과 2025년, 나의 발걸음은 거침이 없었다. 칠순 기념 산행 10곳을 완주했고, 백록담 세 번에 백운대와 대청봉까지 섭렵했다. 어느 산줄기를 타도 나 같은 '7학년'을 만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런데 이 거침없던 행보에 강력한 태클이 걸렸다. 상대는 다름 아닌 아내. 잘 달리던 나의 앞길에 아내가 던진 '품위'라는 이름의 딴죽이 나를 꼼짝 못 하게 붙들고 있다.
아들 부부와 테니스를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건의 발단은 다음 주 토요일로 예정된 '운명의 대결'이다. 상대는 아들과 며느리. 젊은 부부가 노련한 할배·할미에게 감히(?) 부부 대항 테니스 시합을 걸어온 것이다. 아들 녀석은 "이번 경주 APEC 뒤땅밟기 여행, 2박 3일 같이 가시죠!"라며 대범한 내기를 제안했다. 지는 팀이 여행 경비 전액을 부담하는 조건. 일정을 넉넉히 잡으면 족히 100만 원은 나올 판이다. 사실 아들 내외가 우리 부부를 여행시켜 주려는 기특한 속내임을 모르는 바 아니나, 승부의 세계에서 '그냥 지는 것'만큼 찝찝한 일이 또 있을까.
여행 경비가 통째로 걸린 이 '세대 간 혼합복식'을 앞두고 나는 치밀한 전략을 세웠다. 아들은 과거 테니스 선수 출신. 그런 아들을 정면승부로 꺾기는 역부족이다. 그렇다면 작전은 뻔하다. 구력이 짧은 며느리 쪽을 집중 공략해 아들이 무리하게 커버 플레이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실수는 원래 조급함에서 나오는 법이니까.
"여보, 이번 게임 이기려면 무조건 며느리 쪽을 공략해야 해."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아내가 정색을 한다. "그건 안 돼요. 가족끼리 어떻게 그런 비신사적인 전략을 써요?" "비신사적이라니? 복식에서 약한 쪽을 공략하는 건 스포츠의 정석이자 세계적 추세야!" "나는 결대로 칠 거예요. 비겁하게 얻은 승리는 기쁘지 않아요."
우리 가족의 행복은 며늘아이 덕이다
사실 부부간에 취미가 같아서, 등산 탁구 등을 같이 하기가 쉽지 않다. 칠순이 넘도록 테니스를 같이 하는 부부는 거의 없다. 그 면에서는 아내가 고맙다. 아내는 어딜 가든 파트너 걱정은 없게 해 준다. 거기다가 아들 부부와 테니스를 할 수 있다는 것은 희귀한 취미생활을 하는 가족. 그런 면에서 며늘아이는 가장 고마운 존재다.
아내는 지방 여행 중에도 시간이 되고 코트가 보이면 어디든 밀고 들어간다. 국화부 관록이다. "서울서 온 부부인데 한 게임 해주세요." 하면, 여자 실력이 되니까 어디서든 싫은 내색을 안 한다. 테니스를 한창 칠 때는 체[력도 좋았다. 등산복도 없이 등산을 처음 갔었다. 쉴 때마다 등산복을 갖춰 입은 사람은 전문가니까 양보하자며, 맨 나중에 출발하곤 했다. 그랬는데도 구간마다 선두에 서게 됐다.
장수대에서 올라 서북능선을 타고 대청봉, 희운각, 공룡능선, 마등령, 비선대로 내려오는 코스였다. 나는 무릎 부상으로 낙오자였기에 아내 혼자 망설이다가 뒤늦게 출발했는데, 일행들을 모두 제치고 1등으로 내려왔으니 나는 놀랬다. 공룡능선 다섯 명의 남자가 아내를 중심으로 등산회까지 만들 정도였다.
다시 테니스로 돌아봐서,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스포츠는 이겨야 한다? 이게 문제 아닌가. 100만 원이라는 거금 앞에서 '결대로 리턴'이라니. 나중에 지고 나서 남들에게 "결대로 치다 졌노라"라고 변명할 텐가. 구구절절 변명하느니 차라리 이기고 나서 경비 일부를 보태주는 게 훨씬 떳떳하지 않겠는가.
나는 '할배 능력자'가 되는 게 꿈이다. 초짜 블로거이자 초짜 유튜버로서 7학년의 콘텐츠 라이프를 즐기는 내게, 이번 승리는 단순한 내기 그 이상이다. 과천 테니스장을 통틀어 나보다 연장자가 드물고 산에서도 또래를 보기 힘든 요즘, 나는 여전히 내가 '현역'임을 증명하고 싶다.
사실 며느리의 기세도 만만치 않다. 구력 2년 차 초보라지만 젊음이라는 무시무시한 에너지가 있다. 최근 구슬땀을 흘리며 연습한다더니 스윙 폼이 몰라보게 달라졌다. 내년까지는 노련미로 버티겠지만, 후년부터는 장담할 수 없는 성장세다. (물론 그때 가선 내기 게임을 안 하면 그만이겠지만!)
며칠 전, 연습 삼아 맞붙어 본 날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며느리, 준비됐나?" "아버님, 살살 부탁드려요~" 나는 첫 서브부터 날카로운 직선 구질로 몰아붙였다. 그러나 돌아온 며느리의 리턴은 경쾌한 '퍽!' 소리와 함께 우리 부부 사이를 예리하게 꿰뚫었다. "좋아, 여보! 바로 그거야!" 아들의 환호성이 터졌다. 아뿔싸, 며느리는 이미 '무서운 초보'의 궤도에 올라와 있었다.
아내 때문에 평화협정을 맺긴 했지만
결국 아내의 완강한 '품위 유지법' 앞에 나는 한발 물러나 '평화 협정'을 제안했다. "좋아, 그럼 진 팀이 경비를 대되, 이긴 팀이 저녁 두 끼는 사는 걸로 합시다." 이른바 중재안이자 화합의 기술이다. 생각해 보면 이 모든 소동이 부모를 모시고 여행을 떠나려는 아들 내외의 예쁜 마음에서 시작된 것 아닌가.
공 하나에 웃음 한 번, 그리고 온 가족이 하나 되는 시간. 그것만으로도 이미 승패는 중요치 않을지 모른다. 며느리의 포핸드가 불을 뿜을 때마다 아내의 미소는 자애롭기만 하다. 다만, 막상 내 주머니에서 100만 원이 나가는 순간에도 아내의 그 표정이 여전히 자애로울지는... 다음 주 토요일, 코트 위에서 확인해 볼 일이다.
'스포츠'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대청봉 2024년 3번 산행 중 3차(&일출) (1) | 2026.05.19 |
|---|---|
| 대청봉, 그 품은 언제나 뿌듯하다 (1) | 2026.05.05 |
| 단풍에 등 떠밀려, 상원사에서 비로봉으로 (0) | 2026.04.07 |
| 2024년 대청봉 3차 산행의 첫 번째 (0) | 2026.04.06 |
| 백록담에 7학년 할배, 한 달에 세 번 오르다 (0) | 2026.03.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