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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필/고교얄개

[응답하라 1972 ⑬] ♪얼굴 마주 보며 쌩끗♬ 그때 그 시절 '고교얄개'의 추억

by 월화 희준 2026. 6. 22.

오래된 서랍을 정리하다 보니 문득 빛바랜 기억 하나가 고개를 듭니다. 50여 년 전, 자옥이를 처음 만난 곳은 달콤한 버터 향이 훅 끼쳐오던, 종로의 한 제과점이었습니다. 당시 제과점은 우리 같이 가난한 고등학생에겐 별세계였죠.


종로 제과점

수영이란 운동은 칼로리 소모가 매우 큰 운동이다. 연습이 끝나고 수영장을 나설 땐 늘 뱃속에 거지가 든 것처럼 배가 고팠지만, 그날만큼은 눈앞의 단팥빵보다 맞은편에 앉은 자옥이가 더 신경 쓰였다. 나는 자꾸 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하며 "미안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쪽지를 한 달이나 늦게 봤다니까. 내가 원래 뒤늦게 시작한 공부에 너무 빠져있다 보니, 가방 깊숙한 곳은 잘 안 봐서...”

사과가 세번 째 겹치자 자옥은 입가에 미소를 띠며 고개를 저었다.

“난 내가 차인 줄 알았어. 뉴욕제과 안에서 한참이나 서성였는데 말이야.”

그 말을 하던 자옥의 볼이 토마토처럼 빨개졌다. 수줍음 많은 열일곱 소녀의 진심은 레드빛이었다.

우리는 빵을 조금씩 떼어 입에 넣으며 어색한 침묵을 달랬다.

수영부의 고된 훈련 이야기, 수영복 차림으로 물빳따 맞던 이야기, 남학교의 무서운 선생님 이야기...

그렇게 첫 만남의 서먹함을 뒤로하고, 우리는 태릉 쪽으로 첫 소풍을 떠나기로 했다. 자옥이가 먼저 가자고 했고, 내가 자신 있게 아는 곳은 운동하러 매일 오가던 태릉 주변뿐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서울의 저 먼 변두리였던 태릉으로 향하는 시내버스는 생각보다 길고 먼 여정이었다. 지금의 전철처럼 양옆으로 길게 마주 보게 되어 있던 버스 좌석에 우리는 나란히 옆으로 앉았다.

덜컹거리는 차체 때문에 몸이 기우뚱할 때마다 자옥이의 어깨가 살짝살짝 내 곁에 닿았다. 무슨 말이라도 건네야 할 것 같았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은 버스의 거친 엔진 소음에 묻혀 자꾸만 안으로 삼켜졌다. 맞은편 승객들의 시선도 괜히 신경 쓰여, 자옥이와 나는 그저 말없이 정면만 바라볼 뿐이었다.

말은 한마디도 나누지 못한 채 삐걱이는 버스를 타고 변두리 길을 달리는 긴 여행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오히려 창가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속에서, 서로의 어색한 숨소리를 느끼며 우리는 온전히 교감하고 있었다. 대화가 없어도 마음이 꽉 채워질 수 있다는 것을, 그 시내버스 안에서 처음 알았다.

당시 70년대 초반 태릉은 지금과는 딴판이었다. 선수촌 주변으로 배 과수원이 참 많았다. 하얀 배꽃이 눈처럼 내려앉은 그 길은 종로의 번잡함을 잊게 할 만큼 평화로웠다.

  
울퉁불퉁한 과수원 길

울퉁불퉁한 비포장 과수원 길을 나란히 걷는데, 자옥의 어깨가 내 팔에 스칠 때마다 심장이 쿵쿵거렸다. 이 분위기를 벗어나려면 무슨 말이든 필요했지만, 우린 말이 없었다. 그때 갑자기 생각난 노래, 가사는 동요 같았고, 리듬도 경쾌했다.

“둘이서 말이 없네, 얼굴 마주 보며 쌩끗.”

서수남, 하청일 콤비가 불러 막 유행하기 시작했던 〈과수원길〉이었다. 자옥과 첫 데이트를 했던 곳이 과수원이었고 그해에 태어난 노래. 훗날 알게 된 가사처럼 우리는 둘이 걷는 길에 말이 없었고, 자옥의 쌩끗 웃음만 있던 길. 그 길은 이듬해에 태어난 박인희의 ‘끝이 없는 길’이 되길 바랐다.

하얀 꽃잎이 바람에 날려 자옥의 머리카락 사이에 내려앉았다. 나는 그걸 떼어주고 싶었지만, 머리를 만지다 오해를 받으면 어쩌나 싶어 그저 걷기만 했었다. 그래도 좋았다.



세상의 모든 색채가 갑자기 선명해지고, 내일이 오는 것이 기다려지는 그런 시절이었습니다. 그날의 눈부신 배꽃 향기와 덜컹이던 시내버스에서의 설레던 공기는 반세기가 흘러 희끗희끗한 백발이 된 지금도, 내 마음 가장 순수한 곳에 여전히 머물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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