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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해 만에 다시 만난 최참판댁

월화 희준 2026. 10. 12. 19:00

하동 최참판댁을 다섯 해 만에 다시 찾았다.

소형차 주차장도 세 곳이나 생기고, 길가엔 기념품과 주전부리 가게가 번란하다.

찾는 이가 많아 사진 한 장 찍기도 쉽지 않으니 다시 올 마음은 없지만, 묵혀 두기 아까운 열댓 장의 사진을 다시 펼쳐 본다.

아주 멀리 아내의 열정도 보인다^^


박경리의 대하소설 『토지』의 숨결을 따라, 초가집 간판마다 서린 평사리 사람들의 삶을 되짚어 본다.

1. ‘영팔 판술네’

평사리의 든든하고 신의 깊은 일꾼 영팔이와 그의 아내 팔순네의 보금자리다. 영팔이는 고직한 성품으로 신의를 목숨처럼 여기며, 훗날 참판댁이 몰락했을 때도 서희의 재기를 곁에서 진심으로 도왔던 인물이다.

가난하고 소박한 초가집이지만 그 안에는 정직하게 땀 흘리며 살아간 민초의 자존심이 담겨 있다. 척박한 땅을 일구면서도 사람으로서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았던 이들의 따뜻한 온기가 마당 구석구석에 맴돈다.

2. ‘김이평 두만네’

잔망스러우면서도 미워할 수 없는 김이평과 그의 처 두만네의 집이다. 이평이는 현실적이고 욕심도 많아 티격태격 삶의 풍파를 일으켰지만, 구한말과 일제강점기라는 매서운 세월을 버텨내던 전형적인 소시민의 모습을 보여준다.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삶의 끈을 놓지 않고 억척스럽게 살아낸 이들의 사연이 가슴을 울린다. 지극히 인간적이고 소소한 욕망을 안고 살아가던 마을 사람들의 사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는 공간이다.

3. ‘월선네 무당집’

붉은 고깔과 징 소리가 아득히 들릴 듯한 월선이네 무당집이다. 어미의 신내림을 받지 않으려 애썼으나 끝내 기구한 운명에 휘말렸고, 이용을 향한 애틋하고 가슴 시린 사랑을 평생 품고 살았던 여인이다.

신분의 벽과 강청댁의 날 선 시기 속에서도 오직 한 사람만을 향한 순정을 지켜냈던 월선이다. 정을 나누면서도 한 생을 한숨과 눈물로 채워야 했던 그녀의 삶을 떠올리니 초가지붕 위의 바람마저 헛헛하게 느껴진다.

4. ‘우물가와 빨래터(동네 아낙들의 소통공간)’

동네 아낙들의 수다와 마을의 온갖 소문이 가장 먼저 피어나던 소통의 중심지다. 휴대전화도 없던 그 시절, 방망이 소리에 맞춰 이웃의 안부를 묻고 집안의 시름과 경사를 나누던 삶의 터전이었다.

티격태격 싸우다가도 누군가의 우스갯소리에 언제 그랬냐는 듯 함께 웃음을 터뜨렸을 아낙들의 모습이 선하다. 고단한 시집살이와 서러운 살림살이를 시원한 샘물 한 바가지로 씻어내던 생생한 민초들의 숨결이 차오른다.

5. ‘정한조 석이네’

을사늑약에 분노하며 동학의 뜻을 이어 의병으로 나섰다가 끝내 목숨을 잃은 정한조와 그의 아들 석이네 집이다. 아비의 의로운 뜻을 이어받은 석이 역시 시대의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민족의 한을 가슴에 품은 채 살아간다.

의기롭고 곧은 기개 뒤에 숨겨진 가난과 남겨진 가족들의 서러움이 마당에 가득하다. 구한말의 혼란 속에서 나라와 정의를 위해 기꺼이 희생했던 보통 사람들의 숭고한 정신이 조용히 새겨져 있다.

6. ‘용이 강청댁’

평사리 최고의 미남이자 비극적 사랑의 중심에 섰던 용이, 그리고 질투와 집착으로 스스로를 태웠던 그의 처 강청댁의 거처다. 강청댁은 월선이를 향한 용이의 마음을 알면서도 정을 끊어내지 못해 평생을 원망과 한으로 보낸 여인이다.

서로를 향해 칼날 같은 말을 내뱉으면서도 기어이 한 지붕 아래 살아가야 했던 얽히고설킨 인연이다. 엇갈린 애증과 피할 수 없었던 삶의 고통이 집안 구석구석에 진하게 피어올라 눈길을 쉽게 거두지 못하게 한다.

7. '칠성이 임이네'(우측)

욕심에 눈이 멀어 참판댁 재산을 탐내다 비참한 결말을 맞은 칠성이와, 간사하고 탐욕스러운 임이네의 집이다. 칠성이는 조준구와 손을 잡고 참판댁을 위협하다 결국 죽임을 당했고, 임이네는 극단적인 이기심으로 삶을 이어간 인물이다.

인간의 추악한 욕망과 배반이 가져온 비극적인 결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소다. 소설 속에서 끊임없이 갈등을 유발하던 이들의 탐욕조차도 결국 가난과 시대가 만들어낸 슬픈 비극이었음을 되새기게 된다.

8. ‘관수 영선네’(좌측)
동학의 잔당으로 끝까지 의로운 길을 걸었던 관수와 그의 딸 영선네 집이다. 관수는 신분제 해방과 평등한 세상을 꿈꾸며 일제의 압제에 끝까지 맞서 싸운 거칠지만 당당한 기개의 소유자다.

민중의 분노와 사회 변혁을 향한 열망이 그대로 녹아 있는 공간이다. 어두운 시대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려 했던 이들의 강인한 의지가 초가집 기둥마다 굳건히 서 있다.

9. 최참판댁 사랑채

최참판댁 사랑채 앞에서 셀카 한 장

아랫마을 나지막한 초가들과는 사뭇 다르게 솟아 있는 기와집으로, 최치수와 윤씨 부인이 거처하며 만석꾼 가문의 위세를 호령하던 공간이다. 기품 있는 처마와 넓은 마당에서 평사리 최고 가문의 엄숙함과 중압감이 동시에 느껴진다.

그러나 한 집안의 영화도 세월과 역사라는 격랑 앞에서는 유구하지 못했다. 조준구의 간계와 수탈로 가문이 몰락해 가는 비극의 중심지였기에, 높다란 기와지붕이 부귀영화의 덧없음을 조용히 일러주는 듯하다.

10. 최참판댁 별당아씨의 별채

어린 서희가 길상이의 손을 잡고 외로움과 공포를 달래던 아담하고 정갈한 공간이다. 어머니를 잃고 홀로 남아 가문의 무게를 견뎌내야 했던 서희의 한 맺힌 눈물과 강인한 의지가 깃들어 있다.

훗날 만주로 망명하여 가문을 일으켜 세우는 거대한 서사의 출발점이 바로 이곳이다. 별채 앞뜰을 바라보고 있으면 서희와 길상이 나누었던 애틋한 교감과, 시련을 이겨내려 했던 어린 소녀의 당찬 기개가 눈에 선하다.

11. 평사리 벌판

악양면을 아우르며 끝없이 펼쳐진 넓고 풍요로운 들판이다. 소설 속 평사리 사람들이 목숨처럼 여기며 피땀 흘려 농사를 짓고, 때로는 토지 매매로 인해 통곡과 기쁨이 엇갈리던 삶의 터전이자 역사적 무대다.

저 푸른 들녘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땅을 지키려 애썼던 사람들과, 나라를 잃고 정든 고향을 떠나 만주로 향해야 했던 민초들의 발자취가 아련히 겹쳐진다. 비록 지금 서 있는 세트장은 새로 만들어진 재현물일지언정, 그 들판에 깃든 민족의 서사와 삶의 진정성은 결코 가짜가 아니다.

관광지로 변해버린 모습에 조금은 아쉬움이 남기도 했다.

하지만 사진 속 간판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가는 동안, 소설 속 인물들과 함께 울고 웃던 기억이 되살아난다.

여행이란 꼭 두 번 찾아가야만 좋은 것은 아니다.

지나간 기억을 사진으로 꺼내어 보는 것, 나이 들어 누리는 또 하나의 호젓한 즐거움이다.
 
       <2026년 올해는 박경리 작가가 테어난지 100 해 되는 해>

평사리에 있는 박경리 문학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