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필

가난했던 아버지와 태릉선수촌

월화 희준 2026. 8. 24. 18:00

아버지!

오늘은 30여 년쯤 거스른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2002년 9월에 쓴 글이므로 약 55년 전 이야기)

제가 중3이 되던 봄, 국가대표 선수들만 묵을 수 있던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관심 없는 듯 덤덤해하셨지만, 저는 세 가지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마어마한 운동 시설이었고,
둘째는 TV로만 보던 스타 선수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뿌듯함이었으며,
셋째는 태어나서 처음 만난 '뷔페식당'이었습니다.

 

축구의 이회택 선수, 이세연 골키퍼, 서윤찬 선수... 투포환의 백옥자 누나와 같은 식당을 사용하기. 


그래도 셋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뷔페식당입니다.

 

밥이 아닌 것들로만 먹어도 되는 세상을 처음 만났습니다


이상하게만 보였던 프라이드치킨과 양식 요리들, 밥이 아닌 것으로만 배를 채워도 되는 세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무엇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몸무게가 늘면 호되게 기합을 받던 억압이 공존했던 공간.
선수촌은 제게 천국 같은 기억과 지옥 같은 훈련이 뒤섞인 곳입니다.

운동선수에게 꿈의 요람이던 그곳으로 합숙을 떠나던 날, 우리 집 밥상이 여느 때와 달랐던 것은 어머니의 배려 같습니다.

고깃국과 기름에 재어 구운 김, 그리고 달걀찜이 올라온 밥상.
일 년에 몇 번 구경할 수 없는 밥상에서 밥을 먹다가, 저는 아버지께 머리를 쥐어 박혔습니다.

밥을 국에 말아 김 한 조각을 띄운 뒤, 수저로 다독다독 적셔서 밥을 뜨면 흐물흐물 사그라진 김이 수저에 얌전히 얹힙니다.
김의 까슬함도 사라져 먹기도 좋고 맛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다가 아버지께 얻어맞은 것입니다. 수저를 입에 문 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이놈의 자식, 밥 먹으면서 무슨 장난질이야?”

밥 먹을 땐 개도 안 때린다는 어머니의 역성을 등에 달고, 밥도 다 못 먹은 채 그날 저는 아버지 품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태릉에서 뷔페식당을 만났습니다.

말만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던 그곳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처음 보는 트레이닝 센터와 호사스러운 침식을 제공받으며 저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기나 하실까? 왜 그러셨을까?'
저는 그저 운동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자식이 미워서 그러셨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결이었습니다.
제 머리맡에서 어머니와 나누시던 아버지의 독백을 듣고 놀랐습니다.

“녀석이 밥 한 숟갈에 반찬을 세 가지(국, 김, 콩나물)나 먹는 게 밉살스럽더라구…….”

잠결이었지만 평생 잊히지 않는 충격이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고 또 운동하는 애인데 왜 그러냐는 어머니의 타박을 다시 들었습니다.

감은 눈에 핑 도는 눈물을 들킬까 봐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때 저는 이상하게도 이다음에 크면, 아버지께 정말 잘해드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울었습니다.

왜 어머니보다 아버지께 효도를 다짐하며 울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살림이 어려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럴 수 있다, 세상의 다른 아버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의 먹성까지 미웠던 아버지의 가난은, 서글픈 연민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는 명문 사립이라며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운동부에 뽑혔는지, 학교에서 놓아주질 않아 고2 중반에야 선수 생활을 접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 공부 실력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체육인으로 성장이 무난했겠지만, 뒤늦게 공부로 진로를 바꾼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운동과 공부 사이에서 죽도 밥도 아닌 청소년기를 보낸 탓에 어려운 고비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정직하셨기에 가난을 헤치지 못하셨고, 그 가난 때문에 운동선수 자식을 키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회한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밥상에 김이 올랐습니다.

한 조각을 국물에 띄워 먹다가 아내를 흘끔 보았더니, 아버님 생각나느냐며 빙긋 웃더군요.

그때 제 나이와 같은 중3이 된 막내 녀석도 따라먹길래, 녀석의 국에 김 한 장을 더 얹어 다독였습니다.
짜다며 밥 한 수저를 얼른 더 먹는 먹성이 귀여워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눈을 흘겼습니다.

아들의 먹성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는 오해의 눈치였습니다.
두 장씩 먹이려면 소금을 털어 내고 주라는 눈치였고, 김이 짜서 다른 반찬을 못 먹는 게 안타깝다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눈칫밥을 먹었습니다.

아버지, 이다음에 저 녀석은 저를 얼마나 기억할까요?
세상에 누구든 돌아가신 부모를 늘 기억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이 흔한 세상을 사는 덕에 아버지를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도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돌이키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지고 선명한 아버지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