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했던 아버지와 태릉선수촌
아버지!
오늘은 30여 년쯤 거스른 이야기를 드리고 싶습니다.
(2002년 9월에 쓴 글이므로 약 55년 전 이야기)
제가 중3이 되던 봄, 국가대표 선수들만 묵을 수 있던 태릉선수촌에 입촌했던 이야기입니다.
아버지는 관심 없는 듯 덤덤해하셨지만, 저는 세 가지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어마어마한 운동 시설이었고,
둘째는 TV로만 보던 스타 선수들과 같이 생활하게 된 뿌듯함이었으며,
셋째는 태어나서 처음 만난 '뷔페식당'이었습니다.
축구의 이회택 선수, 이세연 골키퍼, 서윤찬 선수... 투포환의 백옥자 누나와 같은 식당을 사용하기.
그래도 셋 중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뷔페식당입니다.

이상하게만 보였던 프라이드치킨과 양식 요리들, 밥이 아닌 것으로만 배를 채워도 되는 세상을 처음 보았습니다.
무엇이든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자유와 몸무게가 늘면 호되게 기합을 받던 억압이 공존했던 공간.
선수촌은 제게 천국 같은 기억과 지옥 같은 훈련이 뒤섞인 곳입니다.
운동선수에게 꿈의 요람이던 그곳으로 합숙을 떠나던 날, 우리 집 밥상이 여느 때와 달랐던 것은 어머니의 배려 같습니다.
고깃국과 기름에 재어 구운 김, 그리고 달걀찜이 올라온 밥상.
일 년에 몇 번 구경할 수 없는 밥상에서 밥을 먹다가, 저는 아버지께 머리를 쥐어 박혔습니다.
밥을 국에 말아 김 한 조각을 띄운 뒤, 수저로 다독다독 적셔서 밥을 뜨면 흐물흐물 사그라진 김이 수저에 얌전히 얹힙니다.
김의 까슬함도 사라져 먹기도 좋고 맛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먹다가 아버지께 얻어맞은 것입니다. 수저를 입에 문 채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이놈의 자식, 밥 먹으면서 무슨 장난질이야?”
밥 먹을 땐 개도 안 때린다는 어머니의 역성을 등에 달고, 밥도 다 못 먹은 채 그날 저는 아버지 품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태릉에서 뷔페식당을 만났습니다.
말만 들었을 때는 믿기지 않던 그곳이 무척 신기했습니다.
처음 보는 트레이닝 센터와 호사스러운 침식을 제공받으며 저는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아버지는 이런 세상이 있다는 걸 알기나 하실까? 왜 그러셨을까?'
저는 그저 운동 때문에 공부를 못하는 자식이 미워서 그러셨을 거라고만 생각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밤, 잠결이었습니다.
제 머리맡에서 어머니와 나누시던 아버지의 독백을 듣고 놀랐습니다.
“녀석이 밥 한 숟갈에 반찬을 세 가지(국, 김, 콩나물)나 먹는 게 밉살스럽더라구…….”
잠결이었지만 평생 잊히지 않는 충격이었습니다.
한창 먹을 나이고 또 운동하는 애인데 왜 그러냐는 어머니의 타박을 다시 들었습니다.
감은 눈에 핑 도는 눈물을 들킬까 봐 이불을 뒤집어썼습니다.
그때 저는 이상하게도 이다음에 크면, 아버지께 정말 잘해드리겠다는 다짐을 하며 울었습니다.
왜 어머니보다 아버지께 효도를 다짐하며 울었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습니다.
얼마나 살림이 어려웠으면 그러셨을까.
그럴 수 있다, 세상의 다른 아버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식의 먹성까지 미웠던 아버지의 가난은, 서글픈 연민이었습니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제가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아버지는 명문 사립이라며 무척 좋아하셨습니다.
그런데 어쩌다 운동부에 뽑혔는지, 학교에서 놓아주질 않아 고2 중반에야 선수 생활을 접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제 공부 실력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의 반대가 아니었다면 체육인으로 성장이 무난했겠지만, 뒤늦게 공부로 진로를 바꾼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습니다.
운동과 공부 사이에서 죽도 밥도 아닌 청소년기를 보낸 탓에 어려운 고비도 참 많았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를 미워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정직하셨기에 가난을 헤치지 못하셨고, 그 가난 때문에 운동선수 자식을 키울 수 없었던 아버지의 회한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 오늘도 밥상에 김이 올랐습니다.
한 조각을 국물에 띄워 먹다가 아내를 흘끔 보았더니, 아버님 생각나느냐며 빙긋 웃더군요.
그때 제 나이와 같은 중3이 된 막내 녀석도 따라먹길래, 녀석의 국에 김 한 장을 더 얹어 다독였습니다.
짜다며 밥 한 수저를 얼른 더 먹는 먹성이 귀여워 쳐다보았습니다.
그런데 아내는 눈을 흘겼습니다.
아들의 먹성을 그런 눈으로 보지 말라는 오해의 눈치였습니다.
두 장씩 먹이려면 소금을 털어 내고 주라는 눈치였고, 김이 짜서 다른 반찬을 못 먹는 게 안타깝다는 눈치였습니다.
저는 오랜만에 눈칫밥을 먹었습니다.
아버지, 이다음에 저 녀석은 저를 얼마나 기억할까요?
세상에 누구든 돌아가신 부모를 늘 기억하며 살기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김이 흔한 세상을 사는 덕에 아버지를 자주 생각하게 됩니다.
그리고 내게도 그렇게 어려운 시절이 있었음을 돌이키게 됩니다.
그것은 세상 그 무엇보다 값지고 선명한 아버지의 흔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