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순 산객의 거짓말
갈 때마다 같은 다짐
설악산 대청봉을 오를 때마다 같은 다짐을 한다.
"이번이 마지막이다."
그런데 그 다짐은 이상하게도 오래가지 못한다.
이번에도 그랬다.

새벽어둠 속에서 몇 번이나 후회했고, 하산길에서는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중얼거렸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하루쯤 지나고 나니 마음은 또 슬그머니 설악을 향하고 있었다.
사람 마음이 원래 그런 것인지, 아니면 대청봉이 가진 묘한 마력이 있는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대청봉만 해도 환갑 넘어서만 십여 차례 올랐다. 2023년에는 봄·여름·가을·겨울 네 계절을 모두 올랐고, 그다음 해에 세 번, 작년에 한 번 더 찾았으며, 비를 맞으며 오른 적도 있었다.
때가 되면 나를 불러내는 설악
그만하면 충분할 텐데, 이상하게 설악은 다시 불러댄다.
그러나 이번 산행은 예전과 조금 달랐다.
71세라는 숫자가 슬며시 어깨 위에 올라앉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예전 같으면 가볍게 넘겼을 오르막이 이제는 만만치 않다. 걸음은 조금 느려졌고 숨은 조금 더 가빠졌다. 몸이 보내는 신호를 무시할 수 없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래도 버스에 몸을 실었다.
설악으로 가는 길은 늘 설렘과 후회를 함께 싣고 달린다.
버스가 오색약수터 들머리에 도착한 시각은 새벽 2시 40분.
세상은 아직 잠들어 있었다.
산 아래는 칠흑 같은 어둠에 잠겨 있었고, 부슬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달빛도 없었다. 가로등 불빛도 희미했다.
마치 세상의 불이 모두 꺼진 것 같았다.
새벽 3시.
헤드랜턴 불빛 하나에 의지해 산길로 들어섰다.
"이제부터 달빛도 없는 길을 다섯 시간 올라야 한다."
그날 사진에 적어 놓은 문구다.
지금 다시 읽어도 그때의 막막함이 그대로 떠오른다.
오색 코스는 원래 만만한 길이 아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르막이다.
급경사의 돌계단은 끝이 없다.
계단도 울퉁불퉁 매우 불규칙해서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하는 길이다.
설악산은 처음부터 친절할 생각이 없는 산이다.
허벅지는 팽팽하게 당겨오고 숨은 점점 거칠어진다.
고개를 들면 어둠뿐, 고개를 숙이면 젖은 돌길뿐이다.
예전에는 산을 오르며 사람들을 추월하는 재미가 있었다.
걸음도 가벼웠고 체력도 자신 있었다.
앞사람을 하나둘 지나칠 때마다 괜히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는 반대다.
뒤에서 들려오던 발소리가 어느새 내 옆을 스쳐 지나간다.
그리고 금세 저만치 앞서간다.
젊은 산객들은 물론이고 대학생쯤 되어 보이는 친구들도 가볍게 나를 앞질러 간다.
예전에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지금은 추월당하는 쪽이 되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한참을 걷다 보면 산길에는 나 혼자 남는다.
그때부터는 다른 싸움이 시작된다.
어디선가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린다.
부스럭거리는 소리도 들린다.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다.
멧돼지일까.
고라니일까.
혹시 반달곰은 아닐까.
어둠 속에서는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해진다.
괜히 뒤를 돌아보게 되고, 랜턴 불빛을 이리저리 비춰 보게 된다.
그럴 때마다 생각한다.
"다음에는 꼭 친구 하나 데리고 와야겠다."
특히 밤길은 동행이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날은 어쩔 수 없이 혼자였다.
짐승을 만나면 무슨 수가 있겠는가.
그저 하늘을 향해 기도하는 수밖에.
공포를 잊으려고 호흡에 집중했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그렇게 다섯 시간 반을 걸었다.
비도 맞고 바람도 맞으며 묵묵히 올라갔다.
8부 능선쯤이었을까.
몸을 피할 곳도 마땅치 않았다.
쏟아지는 비를 그대로 맞으며 도시락을 꺼냈다.
차가운 밥이었다.
손에서는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래도 이상하게 맛있었다.
배가 고프면 반찬도 필요 없다는 말을 그날 다시 실감했다.
오전 8시 30분.
마침내 대청봉 정상석 앞에 도착했다.
그런데 사진 찍어줄 사람이 없다
공휴일이면 인증사진을 찍기 위해 긴 줄이 늘어서는 곳이다.
그런 정상에 나 혼자 서 있었다.
비 때문인지, 평일이라서 그런지 정상은 적막했다.
잠시 세상을 혼자 가진 기분이었다.
정상석 옆에서 조금 더 머물고 싶었다.
하지만 설악은 오래 머물게 하지 않았다.
바람이 점점 거세졌다.
빗줄기도 굵어졌다.
결국 몇 장의 사진만 남긴 채 발길을 돌렸다.
그래도 마음속에는 작은 만족감이 남았다.
칠순의 산객이 이 험한 길을 끝까지 걸어 올라왔다는 사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산길은 봉정암 방향으로 잡았다.
중청대피소 공사 현장을 지나는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 쏟아지던 비가 거짓말처럼 잦아든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붉은 단풍이 눈앞에 나타났다.
혹시 비 때문에 단풍도 제대로 못 보고 내려가는 건 아닐까 걱정했는데, 봉정암에서 영시암으로 이어지는 계곡은 온통 가을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비에 씻긴 단풍은 유난히 선명했다.
붉은색은 더 붉었고 노란색은 더 노랬다.
젖은 잎사귀마다 빛이 맺혀 있었다.
셔터를 누르는 손끝에 다시 힘이 들어갔다.
조금 전까지 죽을 만큼 힘들었던 오르막은 어느새 기억 저편으로 밀려났다.
사람이 참 단순하다.
고생은 금방 잊는다.
아름다움은 오래 남는다.
봉정암에서는 점심도 얻어먹고 커피도 한 잔 마셨다.
산에서 마시는 커피는 늘 특별하다.
영시암을 지나 백담사까지 내려오는 길에서도 몇 번이나 발길을 멈췄다.
사진을 찍기 위해서였다.
그 풍경들을 담지 못했다면 걸음이 훨씬 무거웠을 것이다.
용대리에서 버스를 탔다.
사당역에 도착하니 밤 10시.
집을 나선 지 꼬박 24시간이 지났다.
몸은 천근만근이었다.
다리는 묵직했고 눈꺼풀은 자꾸 내려앉았다.
침대에 눕자마자 한마디가 튀어나왔다.
"다시는 이런 산행 안 한다."
그 말만큼은 진심이었다.
정말 진심이었다.
그런데 이상하다.
하루가 지나자 생각이 달라졌다.
힘들었던 기억은 흐려졌다.
어두운 밤길도 희미해졌다.
비를 맞으며 걷던 고생도 점점 멀어졌다.
대신 비에 젖은 단풍이 떠올랐다.
구름 사이로 보이던 설악의 능선이 생각났다.
봉정암의 따뜻한 커피 향도 떠올랐다.
그리고 어느새 나는 또 대청봉을 생각하고 있었다.
다시는 안 간다던 길.
내가 가장 잘 지키지 못하는 약속이다.
아마 내년 가을에도 그럴 것이다.
설악의 단풍이 물들기 시작하면, 나는 또 배낭을 챙기고 있을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오색의 새벽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갈 것이다.
물론 그때도 똑같이 말하겠지.
"이번이 정말 마지막이다.
2026년 4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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