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필/고교얄개

[응답하라 1972 ⑪] 얄개들의 첫 삥땅은 목욕탕비

월화 희준 2026. 6. 1. 18:00

고등학교 2학년이 된다는 건 꽤 신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도 선배들의 절반이 졸업해 나갔고, 갓 입학한 후배들이 그 자리를 채웠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더 이상 막내가 아니었다. 괜히 어깨에 힘도 들어가고, 후배들을 만나면 이유 없이 걸음걸이도 달라졌다.

 

두 가지 큰 변화

그 무렵 우리 사회에는 두 가지 큰 변화가 있었다.

하나는 미국 대통령 닉슨이 중국을 방문한 사건이었다.

당시만 해도 반공은 일종의 생활규범이었다. 고교 입시에서 동점자가 나오면 반공도덕 점수로 결정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세상에서 미국 대통령이 중국의 모택동을 만나러 갔으니 사람들은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신문도 떠들썩했고 어른들도 수군거렸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고등학생이던 우리도 그 분위기를 느끼긴 했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더 큰 관심사는 따로 있었다.

대폭 오른 목욕탕 요금, 그 인상폭이 62.5%였다.

어른 요금이 80원에서 130원으로 인상됐다. 지금 보면 별것 아닌 것 같지만 당시에는 결코 작은 돈이 아니었다. 대학 등록금이 10만 원 남짓하던 시절이니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꽤 부담스러운 인상이었을 것이다.

신문에서는 시민들의 불만이 이어졌고 여기저기서 아우성이 나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오히려 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거 괜찮은데?"

왜 그랬을까.

그 이유는 간단했다.

목욕비를 삥땅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농구장 패거리들은 방과 후가 되면 학교 운동장 한쪽 아스팔트 코트로 몰려갔다.

공 하나만 있으면 하루가 짧았다.

슛을 던지고, 몸싸움을 하고, 넘어지고, 다시 뛰었다.

해가 질 때까지 농구를 하고 나면 교복은 땀에 절어 있었다.

셔츠는 물론이고 혁대까지 젖었다.



정말 과장이 아니다

혁대를 비틀면 물이 떨어질 정도였다.

집에 가기 전 학교 수돗가에 모여 대충 씻는 것이 일상이었다.

수건 한 장 돌려 쓰며 머리에 물을 끼얹고,

비누가 있으면 비누를 쓰고,

없으면 그냥 물로만 씻었다.

그리고 목욕탕의 성인 요금, 그것이 바로 삥땅이었다.

그 시절 친구들도 떠오른다.
 
수업시간엔 졸다가 쉬는 시간만 되면 날아다니던 놈,

선생님은 자기를 포기했지만 자기는 선생님을 포기할 수 없다던 놈,

단어 외운 뒤 사전 씹어 먹고 별짓 다 했지만 영어성적 바닥이던 놈,

국어 시간에 교과서 터프하게 읽다가 사레들려 고생하던 놈,

회충약도 캐러멜이라고 뺏어 먹던 놈,

학교 생일도 아닌데 자기 생일이라고 학교 쉬던 놈,

목욕비 탄 날은 일요일에도 학교 오던 놈,

그 녀석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몇몇은 연락이 끊겼고, 몇몇은 동창회에서 만났고,

몇몇은 이미 먼 길을 떠났다.

젊을 때는 영원히 함께할 것 같았는데 세월은 생각보다 빨랐다.

이름을 떠올리려 해도 가물가물한 친구들이 늘어간다.

사진 한 장만 봐도 웃음이 나는데 정작 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

돌아보면 목욕비 몇 푼 삥땅 치던 그 시절은 참 즐거운 시절이었다.

돈이 목적이 아니라 친구들과 어울리는 시간이 좋았고, 농구공 하나로 하루를 채울 수 있었으며, 학교 수돗가에서 머리를 감으면서도 세상 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어른이 된 뒤에도 우리는 여전히 무언가를 삥땅 치며 살고 있지 않았을까.

시간을 삥땅치고, 건강을 삥땅 치고,

가족과 함께할 기회를 삥땅 치고,

지금 이 순간의 행복을 자꾸 미래로 미루며 살고 있지는 않았을까.

학교 수돗가에 모인 얄개들 <삽화: 정종해>


목욕비 몇십 원은 웃으며 추억할 수 있다.

하지만 인생에서 정말 소중한 것들을 슬그머니 빼돌린 채 살아왔다면 그건 매우 아쉬운 일이다.

그래서인지 요즘은 가끔 그 수돗가가 생각난다.

농구공 튀는 소리.

깔깔거리던 친구들.

그리고 목욕비로 드나들던 국화빵집

그때의 삥땅은 잊혔지만,

그 시절은 아직도 마음 한구석에서 반짝이고 있다.

 
    이전 얄개전: 응답하라 1972   //
                다음 얄개전: 응답하라 1972 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