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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에서 내려온 늙은 다리가 문제였다

월화 희준 2026. 5. 26. 18:00

설악산 대청봉을 향한
무박 2일 산행이 시작됐다.

밤 11시 30분, 서울 출발.

졸음과 기대가 뒤섞인 버스 안에서
나는 괜히 창밖만 오래 바라봤다.

'회귀하는 이 차를 시간 안에 탈 수 있을까?'

새벽 1시 20분.
인제휴게소의 불빛은, 유난히 밝았다.

편의점 한구석에서는
컵라면들을 후루룩후루룩.

그 냄새가 어찌나 좋던지
순간 마음이 흔들렸다.
후루룩 두 번에 온몸이 깨어날 것 같았다.

하지만 참았다.

몸에 안 좋다는 생각도 있었고,
혹시라도 탈이 나 체력이 떨어질까 겁도 났다.

그만큼 이번 산행만큼은
반드시 성공하고 싶었다.

새벽 2시 30분.

한계령 도착.


국립공원 문이 열리는
새벽 3시까지 기다려야 했다.

5월 하순인데도
산바람은 차가웠다.

얇은 점퍼를 덧입었는데도
몸이 먼저 떨렸다.

새벽 3시.

드디어 산행 시작.

랜턴 불빛들이
개미 떼처럼 산길을 기어 올라갔다.

두 시간쯤 지나
한계령 삼거리에 도착했다.

그제야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사람이 너무 많았다.

휴일 설악산은
산이 아니라 정체 구간이었다.

좁은 바위길마다 줄이 막혔고,
앞사람 등산화만 보며 기다려야 했다.

결국 대청봉 정상 도착 시각은
오전 10시 40분.


무려 7시간 40분이 걸렸다.

평소보다 훨씬 늦었다.

정상 체류 시간은 고작 20분.

사진 몇 장 찍고
곧바로 하산을 시작했다.

오전 11시.

이때까지만 해도
문제없다고 생각했다.

봉정암.

수렴동 대피소.

영시암.

구간 시간 계산은
대체로 맞아떨어지고 있었다.

“괜찮아. 맞출 수 있어.”

혼자 그렇게 중얼거리며 걸었다.

그런데 영시암을 지나며
갑자기 머리가 번쩍했다.

서울행 전세버스.

용대리를 지나가는 시각이
오후 5시 25분이었다.

순간 계산기를 두드리듯
머릿속이 바빠졌다.

영시암에서
백담사 셔틀버스 타는 곳까지.

나는 막연히
1시간이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계산이 틀렸다.

실제론
빠른 걸음으로 밀어붙여도
1시간 20분 가까이 걸리는 길이었다.

그때부터였다.

마음이 급해졌다.

지친 하산길에서
10분을 당긴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다리는 이미 풀렸고,
허벅지는 돌덩이 같았다.

그래도 걸었다.

거의 뛰다시피 걸었다.

머릿속엔 한 생각뿐이었다.

“버스 지나가면 끝이다.”

백담사에서 겨우 셔틀버스를 타고,
용대리에 내려서는 또 걸었다.

마지막 20분은
정말 정신없이 이동했다.

땀이 눈으로 흘러 들어왔고
숨은 턱밑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용대 삼거리에 도착한 시각.

오후 5시 30분.

딱 5분 늦었다.

내가 타야 할 버스는
이미 떠난 뒤였다.

순간 멍해졌다.

조금 전까지
죽을힘을 다해 걸었던 80분이
허무하게 공중으로 날아가는 느낌이었다.

17,700원 시외버스 비용보다
더 아까운 게 있었다.

바로 내 자존심이었다.

수없이 산을 다녔고
시간 계산도 늘 자신 있었다.

그런데 이번엔 달랐다.

체력이
계산을 못 따라갔다.

조금만 더 빨리 걸었더라면.

조금만 더 뛰었더라면.

그 생각이 계속 머리를 때렸다.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예전 몸이 아니란 걸.

산은 늘 솔직하다.

젊은 날에는
근성으로 덮이던 것들이,

칠순 넘긴 나이에는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는다.

그날 이후 다짐했다.

다시는 휴일 무박산행은
무리니 절대 하지 말자고.

특히 설악산은
시간보다 체력을 먼저 계산해야 한다.

하지만 이상하다.
사람 마음 참 모르겠다.

다시는 안 간다 해놓고,
벌써 다음 산을 찾고 있진 않았는지?


                                                                       => 지리산 천왕봉 산행기 2026.5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