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필/고교얄개

[응답하라 1972 ①] 벼랑 끝에서 빌린 아버지

월화 희준 2026. 3. 20. 21:50

<이 글은 제 브런치에 연재한 ‘월화만필’을 수정한 글입니다>

이제는 웃으며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때는 분명 벼랑 끝에 서 있었다.

문득 떠오른 기억 하나.
아버지를 ‘빌렸던’ 날이 두 번 있었다.

워카 신은 필자와 음악대장 이강열의 옆모습이 보인다


고등학교 시절 나는 싸움꾼은 아니었지만,
주먹패들에게 기죽지 않고 다녔다.
교복 바지 대신 건빵 주머니가 달린,
미군복을 입었던 복장 덕분도 있지 않았을까.

중고 워커는 끈을 반만 맨 채 너풀너풀,
학교건 시내건 동네건 너풀대며 다녔다.

선생님께 몇 번이나 걸렸지만, 복장은 고칠 수가 없었다.
어머니께 “군복도 괜찮다, 군화도 괜찮다”라고 큰소리를 쳐버린 뒤였으니까.
바지나 신발 살 돈을 또 타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생활지도 선생님에게서 최후통첩이 왔다.

“부모님을 모셔 올 것.”  

하루를 사흘처럼 고민했다.
그리고 끝내, 학교 앞 탁구장으로 갔다.
그곳 주인을, 아버지로 모셔가기로 한 것이다.
 
어떻게 설득했는지 아저씨를 조르고 또 졸랐다. 다만, 그날 교무실을 나오던 그의 표정만은 기억난다.

“다시는 못 할 짓이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가던 뒷모습. 
복장 문제는 하복 입는 철이 되어서,
봉합되었고, 사건은 끝난 줄 알았다.

하지만 달포 뒤, 더 큰일이 터졌다.
기말고사에서 커닝을 하다 걸렸다.

커닝에도 두 부류가 있다.
자주 해서 걸리는 쪽, 
어쩌다 해서 서툴러 걸리는 쪽.

나는 당연히 후자였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보다
더 많은 메모가 필요했다.
책받침은 증거물로 압수되었고,
나는 또다시 벼랑 끝에 간신히 서있었다.

“부모님을 모셔 올 것.”

이번에는 더 막막했다.
어머니를 모셔갈까 했지만,
내가 아는 ‘아주머니'는 없었다.

국화빵집 아줌마는 왠지 어울리지 않았고,
문방구 아줌마는 얼굴이 알려져 있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결국 나는, 다시 탁구장으로 갔다. 

워카 신고 활짝 웃는 못난이가 필자

아저씨는 펄쩍 펄쩍 뛰었다.
나는 더 침착하게 매달렸다.

“한 번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 아닙니까.”
“먼저번 그 선생님이 아닙니다, 한 번만 살려주십시오.” 

그리고 결정타를 날렸다.
“내일부터 애들 좀 몰고 오겠습니다.”
조건이 붙었다. 한 달간 탁구장 청소.  

그렇게 나는,
두 번째 아버지를 빌리는 데 성공했다.
사실 그분은, 나를 좋아했고, 꽤 아껴주시던 분이었다.
그래서 더 미안했는데 사건은 엉뚱한 데서 벌어졌다. 
 

선생님을 만난 탁구장 주인

교무실, 선생님과 악수를 나누던 순간이었다.

“박고수입니다.”

순간 모든 공기가 멈춰섰다. 

“성씨가 박 씨세요?”

가짜 성씨 대신 자기 본 성을 말한 탁구장 주인. 무심코 자기 본명을 말해버린 것이다.

‘고수’는 또 무슨 고수인가.

머릿속이 하얘졌고 등골이 서늘했다.
아, 여기서 끝이구나 싶었다.

하지만 흘끗 보니,
그의 얼굴도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실수였다. 그걸 확인하는 순간,
나는 길은 잽싸게 정해졌다. 
밀어붙이자. 아니면 무기정학이다.

얄개들의 머리는 빠르다.
그래, 외삼촌으로 가자.
나는 더듬거리며 말을 꺼냈다.  

“저… 사실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지금 제주도에…”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선생님이 먼저 받아버렸다.

“아, 재혼? 그런 아버지 셔?”
“아이구, 이리 앉으세요.”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제주도의 '제'와 재혼의 '재'를 혼동하신,
선생님께서 어색한 분위기를 쇄신하고 계셨다. 나는 그저 고개만 끄덕이는 입장이 될 수밖에.  

선생님은 나를 위로했고, 격려까지 해주셨다.
의붓아버지를 둔 아이로.  

그날 이후, 나는 몇 번이나 다짐했다.
진짜 아버지께 죄송한 마음, 잊지 않겠다고.
효자 중의 효자가 되겠다고.

그 결심은 시험이 끝나면 함께 사라지곤 했지만. 그래도 이상하게, 그 마음 하나는 남아 있었다.
‘조금이라도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지.’  

그런데 마음먹는 대로 모두가 모범생이 된다면, 그 세상은 삭막하지 않을까.

개나 소나 모두 모범생뿐이라면
세상은 얼마나 재미없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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